[국어]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김소월 1편 '거미줄에 얽힌 잠자리'

임인규 승인 2021.05.06 17:10 | 최종 수정 2021.05.25 14:05 의견 0

겉으로 보기에는 일본 유학파 그것도 명문 히토츠바시대 상과(경영학)에 다녔고 14살에 정혼해 요절할 때까지 부인과 4남 2녀의 자녀를 둔 행복한 아버지로 보이는 시인.

하지만, 이는 겉모습일 뿐 하나부터 열까지 풀리는게 없었던 일제시대의 문인이었습니다. 스스로도 자신을 '거미줄에 얽힌 잠자리'라고 부를 만큼 그 시대의 그늘에 철저히 잊혀질 뻔했던 시인이었죠.

엇갈린 만남

소월 김정식은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잘 알려진 평안북도 구성시에서 1902년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소월이 네살 때 일본 노동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정신병을 앓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합니다. 이 후 할아버지 집으로 갔다 숙모인 계희영과 만나게 되는데요. 어린 소월에게 전래동화나 동요를 많이 알려줘서 새엄마라고 부를 정도로 따랐다고 합니다. 이렇듯 김소월의 일생은 불운과 행운이 교차하는 삶을 갑니다.

사진찍기를 싫어했던 김소월의 초상화는 영정사진을 기초로 그려집니다.


할아버지 집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평안북도에 있는 명문 오산학교에 진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김억을 만나게 된 것은 운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김억은 김소월의 스승이자 오산학교의 선배이기도 합니다. 김억 역시 일본유학파로 영문과에 다녔으며 당시 생소했던 외국문학 이론들을 국내에 소개했고 동아일보 문예부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창조>, <폐허>등 동인지를 통해 낭만주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오산학교 재학시절에 김소월의 자질을 높이 평가해 <창조>에 그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죠.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 김소월을 이끌어 주었지만 나중에 일제에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됩니다.

하지만, 오산학교는 1919년에 일제에 의해 폐교가 되는데요. 이 후 재건과 폐교를 거듭하다 서울 한복판에 개교합니다. 바로 용산구에 있는 한강조망의 오산학교가 그것입니다.

오산학교에 대해 좀 짚어봐야 되는데요.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으며 유언에서 자신의 몸을 생체표본으로 사용하라고 할 정도로 겨레의 광복과 교육에 평생을 바쳤던 분입니다.

교장으로 재직했던 조만식 선생은 월급도 받지 않고 기숙사에서 학생과 같이 기거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독립운동가였기도 한 조만식 선생은 '우리가 만든 것은 우리가 쓰자'는 물산장려운동을 벌였고 신간회와 YMCA 활동을 했지만 해방이후 민족의 통일정권을 부르짖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반대파로 숙청을 당해 끝내 죽게 됩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 춘원 이광수,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쓴 염상섭, 씨알사상으로 유명한 함석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의 고문으로 옥에서 사망한 한국어학자 이윤재, 소설 임꺽정의 저자이자 11대 교장인 벽초 홍명희까지 가히 당대 교육계 어벤저스라고 할 수 있을만큼의 인재들이 이곳에서 근무한 바 있습니다.

특히 김소월은 벽초 홍명희의 동생 홍시옥의 딸인 홍단실과 15세에 혼인을 하게 되는데요. 조혼 풍습에 따라서인데 나중에 오산학교를 다니며 같이 수업을 받던 오순이라는 이름의 여성과의 교제로 인해 삼각관계가 됩니다. 하지만, 오순은 19세의 나이에 시집을 가게 되고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사망하게 됩니다. 이 때 김소월이 지었던 시들이 바로 '초혼', '접동새', '먼 후일', '풀따기' 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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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어!
불러도 주인(主人)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心中)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초혼>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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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 먼 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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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된 오산학교를 뒤로 하고 소월은 나머지 학업을 배재고에서 마치게 되었고 이 후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그렇지만 한 학기가 지나고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조선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어 할아버지의 반대로 일본에 다시 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 때 소월은 숙모에게 자신이 '거미줄에 얽힌 잠자리' 같다며 한탄하게 됩니다.

이 후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탄광도 문을 닫게 되고 고향으로 가 동아일보 지국을 열지만 서울이나 평양도 아니고 신문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아 결국 폐업하게 됩니다.

뭔가 꿈을 펼쳐보려고 하면 자꾸 접히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죠. 사랑도 그렇고 학업도 그렇고 심지어 사업마저 제대로 되는게 없었습니다.

신문사가 문을 닫은 후 김소월은 술에 의지한 날이 많아졌고 심한 관절염을 앓게 되었는데 통증으로 인해 아편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향년 32세인 1934년 12월 24일 사망하게 되는데 사망원인은 아편과다복용으로 인한 후유증인 것으로 전해지며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 라고 한 말은 꽤나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스승 김억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의 후배인 백석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김소월의 시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거미줄에 얽힌 잠자리'는 당시 모든 지식인들, 일반 백성인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바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연상시키는 김소월의 단말마가 아니었을까요.

다음편에는 그의 작품에 대해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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