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고개는 항상 아래로 향해 있다.
스마트폰 화면에 고정된 얼굴.
철벽보다 더 두꺼운 이어폰
대화는 불가능하다.
마치 공자가 논어에서 얘기한 ‘예가 아닌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는 격언을 수행하는 것만 같다.
30도 아래로 내리꽃힌 시선을 조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하겠다는 결심이 든 것은 지난 12월.
오랜만에 화방에 들러 마커터치패드 A3용지와 비엔팡 브리스톨, 만화원고용지 등 각기 다른 재질의 스케치북을 사서 끄적대기 시작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결국 뭔가 그리는 걸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턱대고 여러 도구를 사모았다.
하지만 뭘 그려야 되지?
문득 아이와 여행갔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 그 기억들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코로나로 인해 학교와 집 이외에는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 세상을 그려보자. 내 주변부터.
막상 그리자니 영 도구들이 익숙치가 않다.
처음에는 마커터치패드에 그리기 시작했는데 종이가 얇아서 그런지 그림을 그리고 난 후 번지는 듯한 느낌을 줬다. 스타일리쉬한 느낌은 마커로 충분히 살릴 수 있었지만 세부적인 표현으로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음은 베인팡 브리스톨 용지. 가로 세로 11인치 14인치에 238그램이다. 한마디로 비싼 용지란 얘기다. 브러쉬 작업이나 마커, 잉크 작업에 최적화된 듯하지만 역시 세밀한 표현을 하기에 뭔가 부족하다.
결국 마지막으로 만화원고용지에 안착했다. 지우개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보풀들을 효과적으로 방지했고 수정후에도 펜촉자국이 남는 현상이 없고 정밀한 선도 표현이 가능했다.

용산만 그리자니 이제는 서울을 그려보고 싶었다. 고생은 사서 하는 타입이다.
폴리크로모스 펜슬을 사용했는데 입자가 부드러워 디테일을 살릴 수 있고 풍부한 색감을 전달할 수 있고 파버 카스텔로 색을 입혀보며 스스로 만족하게 된다. 피그마에서 나온 마이크론 만화작품용이다. 0.03으로 주로 라인작업을 많이 했다.
그동안 더 이상 배울게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완성된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작업을 해가면서 너무도 작은 배움들이 많이 뒤따랐고 어느새 그걸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배움은 언제든 늦지 않고 항상 기쁨을 주는 것이라는 걸 나이 50에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